역사의 사건 3·1운동에 대하여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장례식에 맞춰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우리는 일제의 무단통치와 무자비한 탄압속에서 꿋꿋이 독립운동을 하는 상황이였다.
바로 1년 전인 1918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은 '각 민족은 스스로 민족의 운명을 결정 지어야 한다' 는 민족 자결 주의를 외쳤다.
이것에 크게 동요를 느낀 우리 민족은 다음 해인 1919년 2월 8일 한국의 일본 유학생들이 도쿄에 모여 2월 8일 독립 선언서를 외쳤으며, 윌슨의 민족 자결 주의와
2월 8일 독립 선언서의 영향으로 전국적으로 퍼지게 된 독립운동이 바로 3·1운동이다.
3·1운동을 준비하기 까지 많은 과정과 수많은 노력들이 있었다.
상하이에서는 1918년 6~7월 무렵부터 여운형, 김규식, 장덕수, 김철, 서병호, 선우혁, 한진교, 조동호 등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그 해 11월 28일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온 크레인 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 그리고 1919년 1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고,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로, 선우혁, 김철, 서병호, 김순애 등은 국내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의 인물들과 협의하여 대규모 독립운동의 추진을 준비
하였다.
미국에서는 1918년 12월 안창호 등이 조직한 대한국민회가 중앙총회를 열어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 등 3인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 하기로 결정 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출국을 허락하지 않자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3개조로 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와 같이 외국에서도 우리 민족은 3.1운동을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하였다.
3.1운동의 시작은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 중 29명이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한용운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재창하면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 선언서는 조선 총독, 일본 정부, 일본 의회, 윌슨 대통령, 파리 강화 회의의 각국 대표들에게 전달되었다.
3월 1일 서울과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의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시위 운동이 일어났고, 2일 이후 20일경까지는 전국 산간 벽지에까지 미쳤다. 3월 12일과 13일에는 서간도와 북간도에서 독립 선언 대회와 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독립운동은 철도 연변을 따라 대도시에서 중소도시로 그리고 읍, 면, 리로 퍼져 나갔으며, 1회에 치지 않고 계속 반복 되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된 마음으로 외쳤던 독립 운동이다.
비록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인하여 실패로 마무리 되었지만, 3.1운동은 내외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10년대 일본의 식민 정책인 무단 정치가 문화 정치로
바뀌었고, 중국의 5.4운동과 인도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등 아시아와 중동 지역 민족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3.1운동의 결실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 되었다. 3.1운동이 전개 되던 3월과 4일에 걸쳐 국내외 여러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