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의식을 끌어올린 ‘단재 신채호 선생’
여러분이 TV이나 인터넷을 볼 때, 유명하거나 멋진 활동을 한 연예인이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태어나거나 자라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연예인에게
조금 더 관심이 가지 않은가요? 오늘 써 내려갈 이야기는 제가 살고 있는 지역, 대전에서 살아온 연예인이 아닌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십니다. 물론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등 잘 알려지고, 모두가 아실 만한 다른 독립운동가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막상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
정확히 어떤 일을 하셨는지 질문을 하면 절반이 정확한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글로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업적을 알리고자 합니다.
[출처:네이버]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1880년 11월 7일, 당시 조선 말기에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현 대전광역시 중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가난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워오셨고, 1898년에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해 많은 것을 공부해오셨습니다. 그 후 1905년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셨었지만 관직을 버리시고 <황성 신문>의 기자로 활동하셨지만 그 해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활동을 못하게 되자,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대한 매일 신보>의 기자로 활동하셨습니다. 당시 <대한 매일 신보>의 주인은 영국인 베델이었기 때문에 일제 통감부의 제지를 받지 않아서, 보다 자유롭게 활동하며 수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민족 의식을 높여 갔습니다. 이렇게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언론인으로서 활동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언론 활동을 통해서 ‘단재 신채호’ 선생님께서 독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셨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출처:네이버]
그렇다면 그저 언론 활동을 통해서만 독립을 위해 노력하셨을까요? 아닙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1907년 28세에 안창호 등에 의해 비밀 결사 신민회에 창립위원으로 참여하였고, 1910년 31세에 신민회 동지들은 구내에서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힘들다는 생각에 중국으로 망명하셨습니다. 1911년에는 광복회를 조직하셨고, 1913년에는 상하이로 넘어가서 독립운동과 함께 교육 활동에 힘쓰셨고, 1918년에는 한국사 연구를 하셨으며, 1919년에는 중국에서 유학하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청년단의 단장으로 활동하셨고, 4월 10일에 상하이 임시 정부를 수립하셨습니다. 이렇게 국내에서뿐만이 아닌 독립을 위해 외국까지 나가서 노력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1922년에 의열단장의 요청을 받고 독립운동노선과 투쟁 방법이 담긴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셨습니다. <조선혁명선언>은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에 널리 퍼졌으며 우리 민족들에게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독립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3년에는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집필하셨고 이후 1925년에는 무정부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1927년에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하셨습니다. 하지만 1928년 결국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0년 형 선고를 받고 여순 감옥에서 생활 하시다가 몸이 쇠약해지셔서 1936년 2월 21일 57세로 감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순국을 앞두시고 “내 죽은 몸이 왜놈 발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달라”라고 부탁하실 만큼 독립에 강한 의지를 보이셨습니다.
[출처:네이버]
단재 신채호 선생,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윤관순 열사 등 우리나라에는 독립을 위해 애쓰신 수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어떻게든 독립을 하려 노력하셨고 활동하셨던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독립이 된 이후의 지금 우리는 그분들을 알고 정확히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닐까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윤봉길 의사의 물통 폭탄, 유관순 열사의 3.1운동 등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서 자세히 알고 있고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저 ‘단재 신채호 선생’이라고만 알고 있던, 어떠한 일을 했는지 자세히 몰랐던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업적을 이제는 자세히 알아둘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하셨는지 질문을 받았을 때 누구보다 부끄럽지 않도록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