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왜곡-일제가 파놓은 함정에 발을 뺄 수 있을까
일본의 우리 역사왜곡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글에서는‘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도 교과서에는 일본이 왜곡하고 날조한 거짓 역사서가 한국 사학계의 주요 사료로 활개를 치고 있다.’ 로 얘기를 이어가는데 북부여에 대해 알아보려 고조선을 먼저 알아보았던 것처럼 일본의 역사 왜곡을 알려면 식민사학을 알아야 일본이 왜곡한 역사에 대해 안다고 말 할 수 있다. 저번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한 글을 썼을 땐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을까’가 부제였다면 이번엔 ‘일제가 파놓은 함정에 발을 뺄 수 있을까’가 부제가 되겠다. 일제는 한국을 36년간 통치하면서 보이지 않는 함정을 파 놓았다. 식민지배의 학문적 기반을 확고히 하여 한국을 식민통치하기 위해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국통맥을 이어주는 우리의 민족사를 그들의 식민 통치에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하고 자신들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관을 만들었는데 그 역사관을 식민사관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연구 성과를 식민사학이라고 한다. 식민사학이 일제가 파놓은 보이 않는 함정의 대표적인 것이다. 일제가 구체적으로 무슨 함정을 파놓았는지 알아보자.
메이지유신과 황국사관(일본의 천황을 신격화함. 일본이 신의 나라이며 일본의 천황은 하늘의 자손이므로 천황의 말은 무조건적으로 신봉해야한다는 것이다.),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 조선사편수회까지 거쳐 일본의 치밀한 계획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사관이 만들어졌다. 식민사관에 기초를 둔 한국사 연구는 19세기 말 도쿄제국대학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신공왕후의 신라정복설과 임나일본부설, 한국역사를 만주(중국)에 종속된 것으로 보는 만선사이론, 당시의 한국 경제를 일본의 시골경제수준으로 보는 이론 등을 내세웠는데, 이러한 논리는 20세기 초 조선침략이 본격화되자 일선동조론, 정체성론, 타율성론, 모방성론, 당파성론이 강조되어 이루어지는 식민사관의 토대가 되었다.
일선동조론은 '일본과 조선은 동일한 조상을 갖고 있다. 즉, 일본민족과 조선민족의 조상은 하나'로 한국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의 보호와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본이 강제로 조선의 재물과 영토를 빼앗아가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부터는 한민족을 아예 말살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이름과 성을 일본식으로 고치는 이른바 창씨개명을 강제 추진하고, 황민화정책(일본 천황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교육 정책.) 으로 신사를 참배시키고 조선인도 일본 천황의 백성임을 선언하도록 강압하였다. 문자와 언어도 일본문자와 일본말을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사상적으로는 두 민족이 하나의 조상·하나의 뿌리를 가졌으므로 한국인도 일본인의 한 부류임을 이론화하여 세뇌시켰다. 일선동조론은 식민지 지배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게 하여 1930년대 일본이 펼친 내선일체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일선동조론을 한국인에게 주입시키고 확산시키기 위해, 1940년 1월 1일에 친일 일문잡지 ‘내선일체’가 창간되었다. 일제 강점기 말, 군국주의 침략이 극도에 달했을 때, 일본은 내선일체의 성취를 위해 조선민족에게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내선일체’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전쟁을 적극 찬양하고, 민족문화의 말살을 꾀하고 일본 문화를 한민족에게 주입시키는 역할을 한 대표적인 반민족지로 약 5년에 걸쳐 일본의 한국인 말살정책을 뒷받침하였다.
타율성론은 한국이 대륙에 붙어 있는 작은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을 들어, 늘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에 의하여 자율적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한국사는 그 형성에서부터 중국 등의 식민지배에서 출발하였다고 보았는데, 이는 한민족의 적극적이고 자율적인 성향을 부정하고 타율적인 부분만을 강조하는 주장이다. 이러한 논리는 나아가 반도성론에 관한 주장으로 더욱 강조되었다. 반도성론은 20세기 초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반도에 대해 두 가지의 지리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한반도의 모양이 일본 열도를 찌르는 날카로운 칼과 같이 위험하기 때문에 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한반도를 식민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반도를 절반의 섬으로 해석하여 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절반의 국민이자 국가로 간주하였다. 지리적 결정론에 근거하여 한반도를 중국과 일본의 두 강국 사이에 끼여 강고한 독립국을 만들 수 없으며 사대주의를 국가의 방침으로 삼았다고 이해하였다. 섬나라 일본과 반도 조선의 관계를 우열관계로 묘사하고 강대국 일본이 독립국을 만들 수 없는 미완성의 반도에 진출하여 반도 인들을 지배하는 것은 반도 인들의 미숙함을 완성시켜줄 수 있다는 논리로 나아갔다.이러한 역사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사에서 타율적인 요소들을 뽑아내어 그것을 한국역사의 주된 흐름으로 서술하고 한국사의 자주적인 모습을 감추려고 하였다. 특히 한국 고대사에서 한국사는 태초부터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로, 남쪽은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즉, 북쪽은 기자․위만․한사군 등의 중국세력이 지배하였고, 남쪽은 신공왕후의 정벌을 전후하여 수세시간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설과 남선경영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한국사의 전개 논리는 그 이후까지도 확대 적용하여 한국사에 있어서의 외세의 역할을 강조하고 그 외세에 의하여 타율적인 역사가 강요되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우리 민족의 독립성, 우리 역사의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도국가가 된 것은 고려 시대 이후의 일이다. 단군 이래의 발해나 고조선 등의 우리 역사를 신화로 치부한 것이다. 이 주장이 웃긴 것은 우리와 같은 반도국가인 이탈리아가 있다.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 자리한 로마라는 도시국가가 지중해와 유럽 대륙을 휩쓸고 영국까지 점유한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결국 반도적 성격론, 타율성론 운운하는 것은 다 일본이 한국 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조작한 것이다.
당파성론은 우리 민족이 서로 헐뜯고 분열하며 단결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일제는 17~19세기의 조선후기 정치사를 당쟁으로 망하였다고 설명한다. 대한제국의 학정참여관 시데하라 히로시는 ‘한국정쟁사’에서 조선당쟁사에 대한 식민사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조선시대 정파를 ‘주의를 가지고 서로 대립하는 공당이 아니라 이해를 가지고 서로 배제하는 사쟁이다’라고 규정하였다. 당쟁이야말로 조선 정치의 고질적인 폐단이라고 하였다. 합병 뒤 일본인 학자들은 당파성론을 보강하였다. 시데하라의 견해를 이어 받은 하야시는 『조선통사』에서 ‘당파가 뚜렷한 주의 강령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러 가지 돌아가는 형세에 따라 동서남북 여럿으로 분속된 것이다’고 규정하였다. 경제사가 카와이 「조선에서 당쟁의 원인 및 당시의 상황」에서 당쟁의 원인으로 경제생활이 가난하고 그것에 따른 사회조직이 문란한 것을 지적하여 경제결정론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호소이 하지메는 『붕당․사화의 검토』의 서문과 결론은 당쟁에 대한 식민지사학의 대표적인 교본이 되었다. 당쟁의 원인을 민족성과 관련시켜 지적하고 있다. 그 논지는 한국인이야말로 피가 더러운 민족이어서 사람을 마구 죽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통치를 맡기는 것은 무모하며, 따라서 혈전의 연속만을 초래할 뿐이다. 라고 하며 많은 일본인 학자들이 조선은 당파 싸움에 의해 망했고 단결이 되지 않는 하등한 민족으로 왜곡시켰다. 3.1운동 이후 한국민족의 민족운동을 분열시키는데 당파성론을 강조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조선사강좌’ 시리즈에서 조선왕조 정치에 관해 ‘이조정쟁약사’와 ‘근세조선사’에서 다루었다. 그 집필자인 오다와 세노는 그 뒤 줄곧 당쟁사 연구에 참여하는데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오다는 3.1운동 이후 내한하여 경성제대 예과부장과 조선총독부 시학관을 겸한 자로 1930년대 쓴 천주교 박해나 홍경래의 난의 원인도 당쟁에서 찾았다. 세노는 16세기 조선시대에 조신 및 선비들이 반대파에게 몰려 화를 입은 사건을 당쟁과 연결시켜 당파성론을 확대시켰다. 이러한 논리에 대해 당시 이광수 등이 동조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광수는 1922년 ‘민족개조론’에서 조선 민족의 쇠퇴한 근본 원인은 타락한 민족성에 있다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그것이 정치로 나타난 현상으로는 ‘자기 일신의 권세를 누리고자 했고, 자기 친척․붕우의 출세를 도모했으며, 당파 싸움을 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당시 한국 지식인들의 민족개조론은 한국인들의 인식체계에 많은 해로움을 끼쳤고 이것은 당쟁과 민족성을 연계시키는 논리로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당쟁의 시기는 200년 설부터 900년 설 등 의외로 길다. 쟁점이 되는 것은 한계선을 선조 초 즉 동인 ․ 서인이 갈라지고 실제 당쟁이 형태를 갖춘 1575년 이전의 시점으로 잡고 있다. 일제는 조선 후기 붕당 정치를 근거로 조선이 당쟁 때문에 망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치인들 사이에 대립이 없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른바 ‘당파 싸움’은 조선 후기 일부 세력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이것으로 우리의 민족성을 논 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 붕당 정치는 상소문 등을 통한 공개적인 정치 투쟁으로 정치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모방성론은 불교나 유교 등 한국의 모든 문화가 외부에서 들어온 것으로, 독창적인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순수한 고유문화란 어느 민족에게도 없다. 예를 들어 유럽 대부분 나라는 기독교다. 기독교는 이스라엘에서 왔지만 유럽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프랑스나 영국이 독창성 없는 모방적 민족이라는 이야기는 말도 안 된다. 결국 이것도 일제가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억지였던 것이다. 순수한 고유문화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월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정체성론은 한국이 여러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겪으며 근대로 발전하는 인류의 보편적 법
칙을 거치지 못해 능동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당시의 조선사회가 10세기 말 고대 일
본의 수준과 비슷하다고 보는 주장이다.일본학자들이 특히 ‘정체성’을 강조하였던 조선후
기 사회의 발전적인 측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일제는 막부 정권이라는 봉건 시대를
거쳤지만, 우리는 중세로 나아가지 못하고 고대에 머물러 있는 단계라는 주장이다. 그러니
뒤떨어져 있던 한국을 근대화시키려는 일본에 고마워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한국사의 해석
에 적용된 정체성론은 본래'아시아적 정체성'에 관한 설명의 연장에서 제기되었다. 아시아적
정체성이란 근대 유럽인들이 아시아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 확대하는 제국주의 진출과정에서
그들의 식민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창조한 이론이었다. 한국사회에 대하여 서구적인 정
체성 이론을 도입하여 자기 력으로는 도저히 더 이상 발달할 가망이 없는 한국에 대해서 식
민지 건설을 강행해서 한국사회의 경제적 진보․발전을 도모해주는 것은 선진국가인 일본의
숭고한 사명이라고 주장하였다. 한국사에 정체성이론을 도입하여 적용한 연구자로는 후쿠다
도쿠조가 있다. 그는 일본 경제학의 초창기에 서구 경제학을 일본에 도입시킨 경제학자로
1902년 한국을 여행하고 그 밖의 연구문헌에 근거하여 1903년 9월부터1904년 11월 사이
에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 라는 논문을 집필하여 ‘내외논총’에 발표하였다.
이 글은 한국의 경제사에 관한 최초의 논문이었지만, 한국사회의 정체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정체성이론을 구성한 전제는 한국의 봉건제도 결여론이다.봉건제도 결여론을 뒷받침하기 위
해서 ‘한국에는 토지사유의 성장이 없고 토지공유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교통경제의 발달
이 저급하고, 전국을 유통하는 화폐경제의 보급을 볼 수가 없다. 한국의 시골은 아직 상공업
의 사회적 분화조차도 지극히 미숙하였다. 한국에 상인은 존재하지 않다.’ 는 등 근거를 들고
있다. 그는 한국이 봉건제도의 세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봉건제도에 대응하는 도부경제-
영역경제의 단계에 도달할 수가 없었으며, 따라서 한국경제는 논리적․필연적으로 그 전단계
인 자족경제-시골경제에 정체되어 있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20세기 초한국사회를
일본의 가마쿠라 시대 (12세기 말경부터 14세기 중엽까지의 약 150년간)보다도 오래된 후
지와라 시대 말기에 해당한다는 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유럽과 같은 봉건제도를거쳐 왔기 때
문에 유럽 여러 국가와 같이 근세국가의 국민경제 수립에 성공하여 나라가 번성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체된 한국은 마땅히 일본문화에 흡수되거나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는 것을 감수하면서 낙후된 경제의 정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
지만 봉건 사회를 거쳐야 근대적인 사회로 진입한다는 역사 발전 단계가 모든 사회에 적용
되는 진리는 아닐뿐더러 그것을 증명하는 학문적 근거도 없다. 또한 조선후기 이래 사회 발
전을 보면 우리는 근대로 향하고 있었다. 일제가 침략하지 않았다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화를 이루어갈 씨앗이 사회 곳곳에서 이미 싹트고 있었다. 또 다른 학자 시까다 히로시
가 있는데 그는 후쿠다 도쿠조의 학문과 기술을 계승 하여 ‘조선에 있어서의 근대자본주의의
성립과정’ ‘조선사회경제사연구’ 과 ‘舊來의 조선사회의 역사적 성격에就하여’ ‘조선학보’라
는 논문을 내놓았다. 그는 한국의 자본주의화는 일본의 자본과 일본인의 기술능력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 이유는 개항 당시 한국 내에서는 자생적인 자본의 축척도
없고, 기업적 정신도 없었으며, 자본주의의 형성을 희망하는 사정과 그것을 필연하는 조건이
모두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봉건제도의 결여와 당쟁의 성행은 조선경
제사회의 발전 가능성에 악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았고, 낡은 유교정신세계의 한국인들의 완
고한 수구주의로 인해 자본주의경제 발전의 전제가 되는 모험 과감의 정신이나 기업가정신
이 육성될 여지가 없었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농업부문에서 모내기의 보급, 견종법의 시
행, 이모작의 확대 등 생산력의 발달에 있었으며 광작 등 새로운 경영방식이 전개되었고 상
업적 농업의 발전, 상업에서의 사상 ․ 도고의 성장, 전국적인 장시의 발달, 수공업 분야에서
의 선대제적 상품생산 등이 이루어졌음이 실증적으로 규명되었다. 따라서 조선후기에 전개
되었던 사회변화의 여러 측면을 통하여 근대지향적인 면이 조선사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음
이 부각되었다.
식민사학에 대해 보기 쉽게 정리하고 여러 주장들에 반박해 보았다.
주권을 찾은 지 반백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그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한 부분이 많다. 저번 글에서도 말했지만 우리 역사가 아직도 교과서에 왜곡돼 있지만 이 함정에 발이 빠져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제는 한국사 재구성 작업에 힘을 기울였는데, 1922년에는 조선사편찬위원회, 1925년에는 조선사편수회를 설립하여 식민사관에 입각한 ‘조선’(37권, 1937)를 발간하였다. 이러한 식민사관은 우리 민족이 열등의식과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심리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 사람은 단결할 줄 모른다.’, ‘한국은 약소국으로 늘 강대국에 시달리다가 망했다.’ 는 등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고 심지어 이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 식민사학이 파 놓은 함정이다. 대부분의 나라는 자신의 역사를 미화하고 자부심을 갖도록 하게 마련이지 우리나라처럼 국민 스스로 깎아 내리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이번엔 ‘헬조선’이라는 말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심지어는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의 시초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라고 생각된다. ‘헬조선’이라는 말은 ‘디시인사이트’라는 사이트의 극단적 친일파들이 한국을 비하하는 용도로 시작된 단어였지만 2010년 취업난이 심해지며 경제가 어려워져 물가는 오르는데 취업은 어려워져 살기 어려운 한국 사회를 지옥 같다며 한국사회의 부조리함을 꼬집어 비판하기위해 다양한 사이트에서 사용하게 되었고 그 후 언론에서 ‘헬조선’이라는 말을 쓰게 되면서 대중화 되었다. 요즘 무언가 힘들다 싶으면 ‘헬조선’이라고 말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사람들은 말의 중요성을 말하는 속담만 백가지가 넘는데 말의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숨 쉬는 것 마냥 생각 없이 말을 뱉는 것이 우리 역사를 잘 알고 있다면 그런 말을 함부로 하기 쉽지 않을 텐데 본인도 모르게 일제의 함정에 푹 빠져버렸구나 싶어 반감이 든다. 본인, 아니면 주변에도 본인도 모르게 일제의 함정에 빠져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번에 함정에서 발을 빼자.
[자료출처-네이버 지식백과]